“시간을 건너온 집념, 혹은 바둑 그 자체”
『히카루의 바둑』을 처음 본 독자라면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 유령이 나오는 바둑 만화야?”
사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령으로 등장한다.
중세 시대의 천재 기사였고, 억울하게 승부를 마치지 못한 채 그 집념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수백 년을 떠돌다가, 우연히 히카루를 매개로 다시 바둑판 앞에 앉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사이의 존재는 단순한 유령 이상의 무게를 띠기 시작한다.
그는 단지 한 망령이 아니라, 어쩌면 바둑이라는 세계에 깃든 정신성 그 자체가 아닐까.
살아 있는 자보다 생생한 유령
사이는 투명하다. 히카루에게만 보이고, 만질 수도 없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감정이 풍부하고, 명확한 의지를 지녔다.
기뻐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때로는 좌절한다.
히카루가 바둑판 앞에서 무관심하게 군다면 속상해하고,
실수를 하면 애가 타고, 승리를 거두면 함께 기뻐한다.
이렇게까지 인간적으로 묘사되는 유령이라면,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그는 과연 죽은 존재로만 읽혀도 되는 걸까?
아니면, 잊히지 못한 마음이 형태를 얻은 것일까?
집념인가, 전승인가
사이가 히카루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과정은 단순한 전수가 아니다.
그는 기술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수의 깊이와, 상대와의 호흡, 바둑이 지닌 철학까지 함께 전달한다.
그가 히카루를 통해 보고 싶어 했던 ‘신의 한 수’는, 결국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수였다.
그러기에 히카루가 사이를 ‘극복’ 해 나갈 때, 사이는 기쁘면서도 조용히 사라진다.
이것은 마치 지식과 정신이 후계자를 찾는 과정처럼 보인다.
사이는 죽은 혼령이 아니라, 바둑이라는 문명의 한 켜에서 피어난 기억의 결정체에 가깝다.
히카루와 사이, 두 개의 자아?
작중에서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히카루가 사이의 영향을 받으며 바둑에 몰입할수록,
사이가 점점 ‘밖’이 아니라 ‘안’에 존재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가 옆에서 말하지 않아도 히카루는 사이의 감각을 떠올린다.
어떤 수를 두고, 어떤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지, 히카루는 스스로 알게 된다.
이런 흐름은 사이가 정신적 가이드에서 내면화된 자아의 한 부분으로 변모했다는 것을 뜻한다.
유령의 존재가 사라진 순간, 히카루는 멈췄지만,
그 멈춤 속에서 그는 사이를 되새기고, 결국 자신의 길로 걷는다.
이 과정은 사이가 단지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히카루의 성장 안에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유령이라는 장치가 말해주는 것
그렇다면, 사이를 굳이 유령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은 ‘과거’라는 시간성과 ‘현재’라는 살아 있는 감정이 만나는 지점을 그리려 했다.
사이는 바둑의 과거이고, 히카루는 바둑의 현재이며, 그 둘의 만남은 전통과 계승을 상징한다.
사이는 유령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하지만 그가 떠난 후에도, 그 정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히카루가 바둑을 두는 한, 그 속에는 사이가 남긴 무언가가 있다.
이 점에서 사이는 단순한 유령이 아니라,
시간과 열망이 형체를 얻은 존재,
혹은 바둑이 인간에게 남기고 싶어 하는 이야기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정말 유령이었을까?
정답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있다.
사이는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마음은 또 다른 사람에게 기억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그 기억이 바둑판 위에서 계속 살아가는 한,
그는 단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사이라는 유령은, 결국 바둑을 사랑한 모든 이들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이야기의 형상이었다.
아름답고 슬프고, 그래서 잊히지 않는 한 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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