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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컬쳐

생명섬유는 외계 생물인가, 문명의 은유인가?

by 글만있다 2025.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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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라킬』이라는 작품의 중심엔 항상 옷이 있다.
그리고 그 옷의 근원이 되는 것이 ‘생명섬유’다.
옷을 가능하게 만드는 소재, 사람을 강화시키는 에너지, 문명을 발전시킨 촉매.
하지만 동시에, 사람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존재.
이중적인 역할을 하며 작품 전체를 이끌어가는 이 생명섬유를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다 보면,
단순한 외계 생물이 아니라, 마치 ‘어떤 시스템의 은유’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과연 생명섬유는 실제로 그저 우연히 지구에 떨어진 외계종일까?
아니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구조’ 그 자체일까?




생명섬유는 왜 인간과 함께 진화했는가

작품 내에서 생명섬유는 명확하게 ‘외계에서 온 존재’라고 설명된다.
그들은 지구에 도달한 후 인류 문명에 영향을 주었고,
사람들이 옷을 입게 된 것도 생명섬유와의 결합 덕분이라는 설정이다.

겉으로 보기엔 이건 SF적 설정에 가깝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왜 하필 ‘옷’인가?
왜 하필 ‘입는 것’인가?

생명섬유는 단순히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기생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문명의 발전을 부추기고 조율한다.
힘을 주되 통제하고, 편리함을 주되 복종을 요구한다.
마치 현대 문명이 주는 모든 것처럼.




‘입는 것’은 통제당하는 것인가

『킬라킬』에서 옷은 절대적인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생명섬유에서 비롯된다.
이 점은 현실 세계에서 ‘문명’과 ‘기술’이 가지는 속성과 겹친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정보를 얻고 소통하지만, 동시에 감시받고 있다.
자동차는 자유를 주지만, 동시에 교통망이라는 체계에 얽매인다.
패션은 자아 표현의 수단이지만, 동시에 브랜드와 트렌드에 따라 소비를 강요받는다.

이런 흐름에서 생명섬유는 외계인이 아니라,
문명 그 자체, 혹은 그 문명에 순응하는 인간의 심리를 은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우리는 자발적으로 생명섬유를 입는다.
스스로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 혹은 사회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하지만 그 대가는, 점점 잃어가는 자율성과 자기 정체성이다.




해방은 ‘벗는 것’인가, 아니면 ‘다르게 입는 것’인가

류코는 센케츠를 통해 생명섬유와 함께 싸운다.
하지만 그녀는 생명섬유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센케츠는 생명섬유지만, 강제로 사람을 지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싸우고, 인간의 의지에 귀를 기울인다.

이 부분이 인상 깊었다.
류코가 싸우는 건 ‘생명섬유 전체’가 아니라,
인간을 억압하려는 생명섬유의 시스템이다.
마치 우리가 기술이나 문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듯.
우리는 도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자유로워질 수도, 얽매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킬라킬』이 제안하는 해방은 단순히 벗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의지로, 새로운 방식으로 입는 것이다.
무엇을 입고, 왜 입는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문명의 도구로부터 주체가 될 수 있다.




생명섬유는 결국 우리 자신이다

생명섬유는 외계에서 왔지만, 인간과 너무도 닮았다.
힘을 원하고, 질서를 만들고, 통제를 위해 복종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은 안락함을 얻지만, 자유는 잃는다.

『킬라킬』은 화려한 전투와 선정적인 연출 너머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우리는 무엇을 입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선택인가, 주어진 틀인가?”

그래서 나는 이제 생명섬유를 외계 생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길들이는 구조의 메타포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우리는, 매일 선택하고 타협하며 살아간다.

『킬라킬』은 그 질문을 과장된 방식으로 보여줬을 뿐,
사실은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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